국수

Say Say Say 2018. 10. 20. 15:51 |

서로 만나는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모든 국수와 면발을 다 먹어봤다

베트남 쌀국수, 파스타, 자장면, 야끼소바, 우동, 라멘....
너랑 헤어지던 날, 네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자장면을 같이 먹어 줄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왠지 입술에 검은 양념을 묻히면서
자장면을 끝까지 다 먹어치울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그때 우리가 같이 자장면을 먹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최소한 같이 자장면을 먹어달라고 말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우리가 서로 등을 돌리고 헤어지는 순간
나는 너에게 그동안 국수만 사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한번쯤은 같이 밥을 먹고 싶었다
돌렸던 등을 다시 돌려 '같이 밥 먹으러 갈래?'라고 묻지 못했다
그 이후로 나는 라면도 먹을 만큼 먹었고
파스타 냄새에도 질릴 만큼 질려서
국수를 먹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도 아직은 국수를 보면,
후루룩 소리를 내면서 국수를 맛있게 먹는 사람을 보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네가 국수를 좋아하는지 한번도 물어보지 못했다
그냥 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말하면 너는 항상 그러자고 대답했다
너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국수를 좋아했을까
국수를 사주는 나를 좋아했을까
그래서 네가 만든 국적없는 볶음국수를 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국수의 탐험을 끝내던 날
비로소 우리는 임무를 다 마쳤으므로 헤어졌던 것일까

우리가 먹은 국수만큼 네가 오래 살아서
네가 이르고자 했던 길에 다 이르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필요도 없고
빈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끝나지 않은 사랑을 향해 이별을 고하지도 않는
평온한 삶을 살길 바란다

먼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울 때마다
나는 그곳 사람들은 어떤 국수를 먹을까 궁금해한다
나와 헤어진 이후 너는 또 얼마나 많은 다른 국수들을 먹었을까 궁금해한 적도 있다
세상에는 자꾸만 새로운 국수가 개발되어 나오고
우리는 탐험할 것이 많아지는 인생을 살 것이다

오늘 점심 너의 메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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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I's
:

2013년 6월

Say Say Say 2018. 9. 4. 12:14 |

일주일동안 이빨 7개가 날아갔다. 확실한 사실은 두 가지다. 이빨 아프면 고생이라는 것과 2시간동안 이 악물고 있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장난이 아니다. 아픈 잇몸을 앙다문 채 명동거리를 걸었다. 오늘 하려던 일이 뭐더라. 일단 핸드폰 바꿔야 하니 알아보고, 약 타러 가는 길에 탈모방지약 알아봐야 한다. 일단 탈모방지약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고간다. 중국어 일본어에다가 이건 영어인가? 대략 8차선 도로에서 역주행하는 것 마냥 사람들은 지나다니는데 2시간을 보낼 곳이 없다. 별수없나. 몇달간 머리도 안 깎고 술만 퍼마시며 살아서 그런지 거울에 비친 모습이 참 가관이다. 덥수룩하게 기른 머리에 어디서 주워온 것 같은 뿔테 안경을 쓴 큼지막한 남정네가 지나가고 있으니 원. 탈모방지약은 간단히 풀렸다. 조금 비쌌지만 일단 써 봐야지. 20대 후반이면 어리다면 어릴텐데 벌써 머리 빠지는 걸 걱정해야 할 나이라니 거참 처량하다. 다시 걸음을 걷기 시작한다.

 

그전부터 알아보려던 책들이 있어 문득 지하의 서점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서점 근방에 영화관도 있지만 영화는 관심이 없어 패스했다. 일단... 피천득의 수필집을 본다. 정말 오랜만에 본다. 헤어진 전 여자친구는 이상의 수필이 좋다고 했던가. 하지만 내게 있어서 수필 하면 단연 피천득이다. 인쇄가 이상하게 되었는지 글씨가 이리저리 번져 있다. 분명 새 책일 터인데 말야. 내가 기억하는 피천득 수필의 오케스트라는 뉴욕 필과 레너드 번스타인이었지만 다시 보니 보스턴 심포니와 찰스 먼치였다. 에구 민구해라. 뉴욕 이야기가 하도 자주 나와서 내가 잘못 알았나 보다. 그리고 폴 오스터, 뉴욕 3부작은 언제 읽어도 싱싱한 느낌이다. 오영수 단편집이 따로 나온 게 있나 알아보고 나서 그제서야 겨우 1시간 50분 가량이 지나갔다. 결국 구하려던 책은 하나도 구하지 못한 채 석제 아재의 오렌지 맛 오렌지를 사고 음료수를 주문하기 위해 붉게 물든 가아제를 뱉어냈다. 카운터에서 요구르트 비슷한 무언가를 힘겹게 주문하고 나서 어딘가의 빈 자리에 앉았다. 저번주쯤 이빨 3개 발치하고 나서 사뒀던 가아제를 꺼내서 다시 입에 물고 있는다. 시간이 어째 늦게늦게 간다. 쏟아지는 햇살에 미쳐버리기 전에 일단 무언가 한잔 마시고 나서 생각할까. 다음달엔 영국도 가야 하고 혼자서는 외롭긴 하지만, 그것보다도 먼저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음료수 마시면서 책이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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