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의 그 남자 -2-

Dear.. 2022. 8. 28. 17:07 |

물론 너같이 국문과 영문과 전공도 안해서 기초도 못 배우고 사회학과 경제학과 이런데 다니는 놈은 글로 밥벌이 못한다는 소리를 듣고 정말 화가 나서 나도 순간 그 선배를 째려볼 뻔 했지만, 그 형보다 더욱 술마시면 말이 심한 사람을 부모로 모시고 살았던 인생인지라 그냥 참기로 했다. 대신 술만 마셨다. 20분 정도 지나서 조용히 누나가 자리로 돌아왔다. 내 생각엔 아마도 내가 화를 낼지도 몰라서 자리를 피했던 것 같다. 마치 불란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는 다시 김치전에 막걸리를 기울였고 그렇게 다시 술자리가 계속되어 동대문에서 2차, 화양동에서 3차를 거치고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내가 각자 따로따로 택시를 태워주고 마지막으로 집으로 두어번 길가에 피자를 만들어놓고 귀가했다.


그렇게 3일 뒤에 나는 출판사 누나와 다시 학교 후문의 전통술집에서 만났고, 그제서야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지만 그 형이 출판사 누나에게 들이댄 지가 어언 1달이 조금 넘었고 다음달 원고 청탁을 해보려 해도 문자건 휴대폰이건 연락 한번 안 받으려 하길래 구실을 대서 불렀대나. 그런 식으로 다른 작가들 끼워서 불렀는데 그 때마다 술자리에서 나에게 한 것처럼 말로 시비를 걸어 상대 작가나 인물들을 화나게 해서 분위기를 죄다 작살내는 경우가 두어번 있어서 이번에는 그나마 덩치가 있는 나와 있을 적에 불렀다는 것 같다. 다른 작가분들에겐 손도 올라갔는데 내가 덩치가 워낙 좋고 화도 안 내서 겨우겨우 잘 마무리가 되었대나. 나는 배가 꺼지도록 껄껄껄 웃었다. 그렇게 둘이서 종로에서 가볍게 술을 마신 다음 서로 지하철역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출판사 누나를 택시태워 보낸 후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려고 돌아선 그 자리에


형이 서있었다.


아마 살면서 그만큼 놀란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할 것이다. 나는 군 시절에도 모두 귀신이 나온다는 초소에서 밤 12시에 혼자 근무하면서도 놀라본 적이 없다. 저번에 본 것처럼 후줄근한 차림새보다는 좀더 차려입은 그 형이 잊어버릴 수 없는 곱슬머리에 두꺼운 뿔테안경을 끼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놀랐지만 나도 들은 게 있기에 그 형에게로 다가갔다.



다 들었어? 라고 그 형이 말했다. 물론 들을 건 다 들었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대로 남자 둘이 사람들 지나다니는 지하철역 앞에서 거리를 두고 서로 뻘쭘하게 서 있는 것도 민구한 그림이었다. 자리를 옮겼다. 종로 뒤편의 지금은 없어진 유명 찻집 근처 모 막걸리집에서 나와 그 형은 고등어 소금구이를 시켜놓고 마주앉았다. 형의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방금도 술을 마셨지만 이미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걸어다니는 동안 내 취기는 어느정도 가 있었다. 담배 있냐고 물어보기에 내 담배와 라이터를 건넸다. 당시의 나는 살렘이라는 초록색 포장지의 멘솔 담배를 하루에 반 갑씩 피우고 있었는데 형이 담배를 보더니 쿡 하고 웃었다. 왜냐고 물어보니 생각보다 의외라서 그랬댄다. 멋부린다고 말보로 레드나 마일드 세븐(현재의 메비우스Movius) 같은 거 피울 것 같았다나. 그렇게 둘이 얘기를 시작했다. 왜 나에게 그런 소리를 했냐 부터 시작해서 형 혹시 일본 모 소설가 팬이냐, 너 사실 그거 노래 가사를 염두에 두고 쓴거 아니냐 등등등. 그리고 내게 사회학과 경제학과 전공자들은 기초도 못 배웠기에 글로 밥벌이 못한다는 폭언을 퍼부은 그 형은.., 자기도 무려 법대생이었다. 

 

그렇게 만난 그 남자와 어언 10년이 넘게 알고 지내왔고, 둘 다 그 후로 더이상은 해당 문예지에 글을 기고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졸업 후 취직을 해서 유럽과 일본을 돌다가 3년 전에야 귀국했고 그 남자 역시 생계를 위해 어느 법무사 사무소에 몸을 담았다. 그 형이 그토록 졸졸 따라다닐 만큼 좋아했던 출판사 누나는 결국 한동안은 그와 사귀다가 법무사 사무소에 들어가버린 그가 결국은 절필한 순간 그를 떠나 우리가 그 당시에 술을 마시면서 욕하던 몇십살 연상인 안 팔리는 소설가와 결혼한 후 이혼했다. 그리고 다시 우리나라에 와서 가끔씩 만나고 지내게 된 그 순간 그는 떠났다.

 

오랜 음주로 간이 녹아버린 채 병상에 누워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린 그 남자와의 첫 만남을 이제와서 추억하기에는 너무 옛날 얘기지만 적어도 형이 가는 길을 외롭게 보내지는 않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나도 곧 그를 따라가겠지. 내가 떠나면 글쎄다. 내 지인 중에서 나와의 인연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한 사실은, 먼저 자리를 잡아놓고 술자리를 펴놓고 있으면 빠른 시일 내에 내가 따라가서 마셔줄 거다. 김 선배. 잘 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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