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의 그 남자 -1-

Dear.. 2022. 8. 24. 03:55 |

한 10년도 더 전에 대딩시절 전역하고 문예지에 시가 게재되어 첫 등단이 정해졌고, 축하한다며 학교 근처로 찾아온 편집부 누나랑 얘기하던 중 이리저리 풀어헤쳐진 차림새에 머리도 안 감은 것 같은 떡진 머리를 하고 두꺼운 뿔테안경을 쓴 삐쩍 마른 사내가 나타났다. 편집부 누나는 반갑게 인사를 하며 근처 대학 다니는 친구인데 저번달에 단편 쓴 사람인 누구씨다 하고 나에게 소개했다. 작품 이름을 듣고 나서야 당시에 책을 펼쳐보고 '이거 일본 모 소설가 짭퉁 아닌가?' 하고 생각하던 어느 단편의 작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겸사겸사 다음 작품 얘기를 위해 같이 만나기로 했다기에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서로가 첫 등단이었지만 일단 내가 나이가 세 살이 어렸던지라 선배님으로 부르기로 했다. 우리는 커피를 한 잔씩 마신 다음 편집부 누나의 권유로 지금은 없어진 신당동의 어느 전집으로 향했다. 내가 당시에도 덩치가 컸던지라 내가 테이블에 혼자 앉고 맞은편에 그 형와 편집부 누나가 같이 앉았다. 우리는 셋이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당시의 문학세태나 자주 보던 영화 얘기, 최근 좋았던 글 얘기, 만나본 원로 작가분들 얘기를 계속 하면서도 나는 형의 눈이 편집부 누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그 형에게 편집부 누나가 눈길 한번 제대로 안 돌렸긴 하지만 형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째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나는 그 형에게도 형은 어떻게 생각하시냐며 하거나 아 오늘 술좀 들어간다며 막걸리잔을 들었다.

형이 점점 누나쪽으로 고개가 가까워지자 누나가 잠시 화장실 좀 간다며 자리를 피했다. 형이 나를 또렷하게 쳐다보았다. 셋이서 술이 꽤나 들어가 있었고 그 형의 안경은 정말 투박한 느낌의 80년대스타일 잠자리 뿔테안경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눈빛만은 면도날 같았다. 나도 술은 자주 마시고 다니는 편이었기에 그리 취하지는 않았던지라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파전을 집어들었다. 그 형에서 내 이름이 처음으로 나왔다. 야 XXX이.

 

내 이름이 네 글자는 아니었지만 한동안 교수님 외에 내 이름을 풀네임으로 부르는 사람과 앞에 '야'를 붙여서 부르던 사람이 잘 없었기에 신선한 반응이었다. 별 수 있나. 이래봬도 선배인데. 나이가 위라는데 네 형. 이라고 밖에는 말할 도리가 없지. 얼굴이 벌개진 형이 면도날 같은 눈빛으로 면도날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지금 OOO이랑 둘이서 놀면서 나는 끼워주기 한거냐? 라고 묻기에 나도 그냥 웃는 낯을 하면서 셋이 같이 모였는데 어째 대화가 잘 안 돌아서 형에게도 말씀을 건넨거고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저 누나 손가락에 반지 있지 않냐. 하고 넘겼으나 이 형은 그때부터 언거푸 막걸리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불평불만을 토해냈다. 너는 새끼가 그딴 글타래 같은 글이나 시랍시고 쓰고 있다느니, 시쓰는 놈이면 좀 예리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너같이 허허허 웃기만 하는 놈이 무슨 시를 쓰냐느니 그게 노래 가사지 시냐 등등.

 

정말 전역하고 처음 만나보는 신선한 진상이었다. 특히나 학교 내에서는 글좀 그냥저냥 쓴다고 선배들이 치켜세워주고 그걸로 나름 밥벌이도 해먹던 시기라 콧대가 꽤 올라있던 차에 그런 소리를 들으니 술김에 짜증이 확 났지만 신선함도 같이 느껴졌다. 그런 지적은 그 형과 내 글이 실릴 잡지사 분들에게서나 가끔 듣던 얘기였고 동년배 중에 내 글을 읽고 평가하는 사람이 별로 없이 그저 '어렵다' 라고만 감상을 남기는 경우가 워낙 많았던지라 내겐 차라리 필요하던 평가였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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